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(문단 편집) === 1365년, 창릉 침략 === 하지만 진해전투 정도의 승리로는 왜구의 횡포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. 이후 6월에는 왜구가 해풍군을 공격했고, 또한 강화도를 건너올 기세를 보이자 밀직부사(密直副使) [[변안열]](邊安烈), 판개성부사(判開城府事) 석문성(石文成)을 보내 방어하게 했다. 다음 해인 1365년 3월에도 왜구가 강화도 주변에서 계속해서 출몰함으로 최영이 군사를 가지고 나서 동강을 지켰는데, 이 왜구들은 창릉(昌陵)에 침입하여 '''고려의 세조 [[왕륭]](王隆)의 영정을 빼돌렸다.''' 이에 공민왕은 최영이 이런 지경이 일어났는데 사냥하고 놀았다면서 꾸짖고 계림윤(鷄林尹)으로 삼았는데[* 이는 최영을 제거하려는 신돈의 계획도 있었다.], 최영은 "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왕이 나를 계림윤으로 인명했으니 이도 왕의 은혜이다."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